밑줄 긋지 않는 이유

2025-06-03

밑줄 긋지 않는 이유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책을 보다가, 책 속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물었다.

“그렇게 인상 깊었으면 책에 밑줄을 긋거나 표시해두지는 않아?”

생각해보니 나는 책에 밑줄을 긋거나 별도로 표시를 남기지 않는 편이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으면 따로 메모장에 적어둔다. 책은 가능한 한 깨끗한 상태로 남겨두고, 메모만 따로 모아본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마음에 드는 책을 여러 번 읽는 편인데, 책에 남겨둔 흔적이 다음 독서를 방해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시 책을 펼쳤을 때 이전에 그어둔 밑줄이 있으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한다. 그 문장이 다시 중요해 보이고, 그때의 내가 중요하다고 느꼈던 생각을 다시 따라가게 된다. 새로운 것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전의 내가 남긴 길을 다시 걷는 셈이다.

그게 조금 아깝다.

좋은 책은 다시 읽을 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문장이 어느 날 갑자기 크게 다가오고, 한때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대목이 이번에는 별다른 울림 없이 지나가기도 한다. 책이 바뀐 것은 아니다. 내가 바뀐 것이다.

지금까지 여덟 번 읽은 책이 하나 있다. 이쯤 되면 거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펼칠 때마다 이상하게 새로운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문장이 뒤늦게 이해되기도 하고, 당시에는 가볍게 넘겼던 대목이 지금의 고민과 맞물려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책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한다.

이전의 내가 본 것에 지금의 내가 너무 쉽게 끌려가지 않도록. 이미 발견한 것보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을 만날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서.

물론 기록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인상 깊은 문장과 떠오른 생각은 따로 메모해둔다. 다만 그 메모를 책 위에 직접 남기지는 않는다. 책은 다음에 다시 만날 나를 위해 최대한 비워둔다.

다시 읽는다는 건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보는 일이 아니다. 달라진 내가 같은 책 앞에 다시 앉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도 책에 밑줄을 긋는 대신, 조용히 메모장을 꺼낸다.

밑줄 긋지 않는 이유다시 읽는다는 건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보는 일이 아니다. 달라진 내가 같은 책 앞에 다시 앉는 일이다.

답보다 질문이 오래 남는다고 믿는다. 일과 사람, 그 사이에서 마주친 질문들을 짧게 적어둔다. 본질에 가까운 마찰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익숙함 바깥의 질문을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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